google-site-verification: google19da2484562f6753.html naver-site-verification: naver3756af53ff0ee605d30c9910ce77bca1.html 사랑은 행복하게 :: '예쁜이름' 태그의 글 목록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심정으로 사랑의 고백을 수도 없이 종이위에 써 내려가도 사랑하는 그 사람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이렇게 하여 대답을 할 수가 있으면 사랑을 고백하는 것도 매우 쉬울 것인데 절대로 상대방이 응답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그 글을 인식하지 못하게 때문이다. 그러면 상대방이 인식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방법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상대방이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사람이 그 글들의 의미를 알고 응답을 하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상대방이 들을 수 있는 위치나 장소에서 소리 내어 읽어 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소리가 음파로 변하여 상대방의 귀를 통해서 알게 되니 즉각적인 응답을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름은 상기의 경우와는 다르다. 상기의 경우에는 사랑의 고백이니 마음을 전달하고자 하는 사람이 직접적으로 전달하지 않아도 상대방에게 충분하게 자기의 생각을 전달 할 수가 있겠지만 이름이란 눈앞에 보이거나 가까이 있는 사람을 향해서 부르는 것이므로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이름의 주인공을 향해서 이름을 부르면 곧 바로 즉석에서 응답이 돌아와야 하는 것이 바로 이름이다.

 

그것은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이름의 주인공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거나 시키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일이 나중에 해야 되는 일이 아니고 지금 당장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름을 부르기 싫다고 종이 위에 적어서 보여 주기도 그렇다. 간혹 부부싸움을 한 부부들이 글자로 이름을 부르고 대화하는 것을 드라마나 소설, 영화를 통해서 보는 경우는 있지만 그러한 경우는 극소수이며 그렇게 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도 글로서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보다는 수화로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면서 살아간다. 가끔 수화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글로서 소통하지만 말이다. 이름이란 당장 그 사람이 필요해서 부르는 것이다. 만약에 이름을 부르는데 대답이 없으면 어떻겠는가? 이름의 주인공에게 전달이 되지 않았는가보다 하고 계속해서 이름을 불러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름의 특수성이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지금 당장 그 이름의 주인공이 필요해서이다. 물론 이름의 주인공이 없는 곳에서 가끔 이름을 부르는 경우도 있다. 그리움을 참지 못한 사람들이 허공에다 대고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물론 이 때 부르는 이름이 이름의 주인공에게까지 전달이 되지 않으니 이름의 주인공은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지 부르지 않는지 알 수가 없으니 대답할 리가 없지만 그리움 하나로 애타게 부르는 것이다.

 

 

김종서의 노래같이 대답 없는 너이다. 대답 없는 이름은 아무리 불러 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름의 주인공이 모를테니 말이다. 그래서 부르지 않는 이름은 이름이라고 할 수가 없다. 이름을 부르지 않는데 대답할 바보도 없을뿐더러 이름의 주인공이 들을 수가 없으니 본인을 부르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르지 않는 이름, 즉 기록만 해 놓은 이름을 우리는 이름이라고 볼 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기록한 이름이 사람의 운명에 작용한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그렇다면 글자로 기록해 놓은 것은 이름이 아니라고 한다면 주민등록상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름은 이름이 아니란 말인가? 하고 반문을 하실 것이다. 기록을 해 놓은 이름이 이름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부르지 않은 이름은 이름이 아니라는 말은 이름은 부르지 않으면 그 어떠한 작용력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 물어도 이름 하면 부르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니 이름을 불러야 만이 소리가 퍼져 나가면서 파장을 일으키게 되고 그 소리가 귀를 통해서 여러 가지 작용력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기쁜 소식이거나 기분 좋은 소리이면 그 소리를 듣는 모든 사람들은 기분이 좋을 것이고, 슬픈 소식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슬퍼질 것이고, 기분 나쁜 소리를 들은 모든 사람들은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루에도 수도 없이 불러대는 이름들, 그 이름이 그 이름의 주인공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름은 부르기 위해서 짓는 것이다. 그러면 이름을 부를 때 그 이름은 음파를 일으킬 것이고, 각각의 글자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들이 음파가 되어 이름을 부르는 사람에게도 작용을 하게 되고 이름의 주인공에게도 작용을 하게 된다. 부르는 이름이 어떠한 느낌을 주느냐에 따라서 이름 주인공의 운명이 바뀔 수가 있다. 보다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사람들은 좋은 이름을 가지기를 원하고 그 이름을 짓는 방법들이 여러 형태로 생겨나고 발전되어 온 것인데 미안하게도 그 모든 성명학이 기록을 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모래를 삶으면서 밥이 되기를 기다린다" 라는 말이 있다. 모래가 밥이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는데 한자로 기록한 이름이 운명에 영향이 미친다고 하니 모래가 밥이 된다고 하는 사람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과학시대에 살면서 정신만은 과거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으니 세상이 좀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예쁜이름, 예쁜이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정신이상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한자획수가 운명에 작용한다고 하면서 작명하는 사람들은 완전한 사기꾼인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들도 이름이 성격을 형성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강한에너지가 넘치는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하는 말이 " 이 아이는 성격이 워낙 강해서 부드러운 이름을 지어야 부드러운 성격이 됩니다" 라고 한다.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성격을 형성한다고 사실을 그들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강한에너지를 가진 아이에게 예쁜이름을 불러 주면 강한에너지가 몸속에서 자폭을 하게 된다.

 

자폭이 바로 자살과 연결되고 건강과 직결된다. 예쁜이름을 굳이 불러야 할 이유를 나는 찾지 못 하겠다. 그 아이의 건강한 삶을 방해하는 예쁜이름을 굳이 불어야 하는지 말이다. 여기에서 이름 전체는 밝힐 수 없지만 "00아" 란 이름의 여자가 공부도 열심히 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검사도 하고 변호사도 하면서 살았는데 48세에 희귀암에 걸려서 3년간 고생하다가 결국은 사망하였다.

 

 

예쁜이름을 가진 연예인 중에 "유재하" 박용하" "구하라" 등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동기는 바로 이름에 들어 있는 "하"의 영향도 크지만 이름 자체가 너무 연약해서 자기에게 불리한 상황이 일어나면 그 상황을 이겨 내지 못하고 자살을 하는 것이다.

 

 

일생을 평탄하게 산 검사 출신의 변호사도 이름이 나약하여 희귀암에 걸려서 젊은 나이에 죽는데도 내 아이들에게 예쁜이름을 지어 줄 것인지 부모가 될 사람들이나 부모가 된 사람들에게 물어 보고 싶다. 본 작명원에서 생각할 때는 이런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이 불쌍할 뿐이다.

 

 

건강한 부자를 만드는 행운의 음파이름/뇌인식 이름학회/청암철학원

 

 

 

 

 

 

 

Posted by 뽀르니의 생각 :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소리를 감지할 수가 있어야 한다. 내가 살아남으려면 나를 잡아먹으려는 존재가 가까이 오는지를 알아야 그 존재로부터 멀리 달아날 수가 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적이 오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은 창조주 하느님이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사람들은 그 언어를 사용해서 서로의 의사를 전달하게 되었는데 언어란 것이 가까운 곳에서는 들리는데 먼곳에 있는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언어를 보완하는 보조 수단으로 사람이 만든 것이 바로 문자이다.

 


 문자는 소리(말)의 보조 수단이며 소리의 하위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문자는 눈으로 읽어 보아야 그 내용을 알 수가 있고 그 문자를 큰 소리로 읽으면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듣고 그 문자의 내용을 알 수가 있는데 그 읽는 소리도 역시 소리이고 말이다. 소리내어 읽지 않는 문자는 그냥 기록물일 뿐이다. 기록물을 가지고 운명에 작용한다고 하는 자체가 비합리적이고 과학적이지 못하다. 더구나 주역으로는 사람의 운명을 알 수가 없다고 주역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데 주역의 쾌를 이용한 81영동수가 무슨 작용력이 생긴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필자가 사주공부를 하면서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운영할 때 사무실 근처에 월간역학에 주역으로 운명풀이하는 사람의 사무실이 있어서 주역을 배우러 간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선생이 하는 말이 “주역으로 무슨 운명을 봅니까? 음양오행으로 봐야지요” 라고 한다. 그래서 필자가 “주역은요?” 라고 하니 “주역은 그냥 참고 삼아 봅니다” 라고 한다. 필자는 맞지 않는 학문은 절대로 배우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주역은 필자의 뇌리에서 멀어져 갔다. 그런데도 주역으로 운명을 본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다기 보다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주역 운운하는 곳에서 상담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과학이 발전하면 생각도 발전하여야 하는데 생각은 일제 강점기에 머물고 있으니 도대체 학교에서 무슨 공부를 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어도 이것은 아니구나! 하고 버릴 수가 있는데 무슨 이유인지 합리적인 생각은 못하고 한자획수에 매달리고 있으니 정신질환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간다. 신(神)이 생존의 방법으로 준 소리가 바로 사람이나 모든 생명체들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다. 아름다운 소리가 들리면 기분이 좋아지고 적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 도망을 가야 살아남을 수가 있다. 모든 생명체의 운명은 소리가 좌우한다. 특히 사람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 언어로 인하여 사람의 운명이 달라질 수가 있으며 매일 같이 나의 존재를 알리는 이름의 작용력이 운명에 작용하는 힘은 더 강력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름이 바로 몸주(나)로 느끼는 무의식이 인식하고 나에게 이름대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생존에 필요한 소리를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존재들이 있으니 그 존재가 바로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이고 일반학자들은 잠재의식이라고 하는 존재들이다. 필자는 이 존재를 생존의식이라고 명명하였다. 왜냐하면 내 생존을 책임지고 있는 내 몸의 모든 구성요소들의 세포이기 때문이다. 몸주인 내가 주인공인 것은 확실하지만 내가 하는 일은 한정이 되어 있다. 누군가가 나를 향해서 돌멩이를 던졌을 때 내가 그 돌멩이를 보고 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내 몸에게 빨리 피하라고 하는가? 만약에 이러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면 그 절차 중간에 나는 그 돌멩이에 맞고 말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 돌멩이를 피하게 된다. 이러한 행위를 하는 존재가 바로 무의식의 존재들인 것이다. 우리가 잠을 자는 시간에도 무의식들은 내 생존을 위해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신분석학자들이나 학자들이 말하는 무의식은 정신세계만을 말하고 있다. 필자가 보는 무의식은 생존과 연관된 모든 행위의 전체적이다.

 

 먼저 무의식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존재들은 내 몸을 형성하고 있는 60조의 세포들이다. 이것이 확실한 이유는 사주에 있는 음양오행 중에서 어느 한 오행이 약하면 그 장기가 약하고 질병에 시달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들,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는 일들도 모두 무의식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잠을 잘 때 꾸어지는 꿈도 무의식이 몸주인 나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꿈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였고 그 꿈에 대한 책들을 읽으면서 필자가 프로이트와 만나게 된 것이다. “해몽정본” 이란 책을 쓸 때 프로이트의 꿈에 대한 책을 읽었던 것이다. 꿈이 잘 맞는 사람들의 사주에 보면 꿈이 잘 맞는 오행이 있다. 신기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예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나 연약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잘 풀리지 않고 고전을 하게 되는지를 알아보자. 물론 예쁜이름이나 연약한 이름을 사용한다고 해서 모두가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의 시대는 과거와는 달리 아이들을 통제하기가 너무 어렵다. 한 마디로 너무 민주화가 되어 있다. 내 아이가 이름에 관계없이 강하게 만들려면 스파르타식 교육이 필요하다. 지금 이렇게 아이들은 가르키는 부모도 없고 교육기관도 없다. 그래서 예쁜 이름이나 연약한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생각이 흔들리고 판단력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고 조금만 정신적으로 흔들려도 우울증에 시달리고 심한 사람들은 지적장애도 생기고 젊은 나이에 불치의 병에 걸리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자연인이다” 란 방송을 보면 완치가 어려운 병에 걸려서 산으로 들어 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 사람들의 이름을 보면 한결같이 이상한 이름들이다. 남자가 여자이름을 사용한 사람도 있다. 이름이 무의식을 스트레스 받게 만드니 무의식의 세포들이 변형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름으로 인하여 병에 걸리는 사람들을 보면 일반적인 병이 아니고 희귀한 병에 걸린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일일이 필설로 다 할 수가 없다. 현재 생존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명예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작명원에서는 필자의 이론을 믿고 아예 작명의뢰를 받지 않는 곳도 인터넷에서 간혹 보인다. 그리고, 필자의 이론을 믿으면서도 한자획수를 가지고 감명을 하고 작명을 하는 작명원들이 거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필자는 26년 간 작명료를 30만원 받고 있다. 그런데도 작명료 비싸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작명료를 더 많이 보내시는 분들도 간혹 있다. 사람의 운명이 걸린 이름을 작명하는데 투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싼 게 비지떡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한자획수로 작명을 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필자도 처음으로 작명을 할 때 3일이나 걸렸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이름을 짓지 못했고 완벽한 획수도 맞추지 못했다. 지금은 컴퓨터가 발달해서 한자획수 이름은 간단하게 전부 컴퓨터로 짓는다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컴퓨터로 짓는 이름은 더 더구나 무용지물이다.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지 않으면 이름의 효과는 적지만 내가 그 이름을 알고 있으면 무의식이 알테니 이름의 작용력은 확실하게 생긴다. 무의식의 존재는 알면 알수록 신비하기만 하다. 예쁘고 부드러운 이름을 사용한다고 해서 모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안 풀리는 사람들은 모두 이름 때문인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이다. 잘 나가는 사람들도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하고 암에 걸려서 사망하기도 하는 것을 많이 본다. 끝으로 켈리포니아 대학교의 교수들이 죽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름에 대한 분석을 하였는데 어감(음파)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어감이 좋은 사람들보다 7.2년 먼저 사망하였고 모두가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쓰고 지금부터 웃어야겠습니다. 오늘 웃어야 내일도 웃을 수 있으니 지금부터 크게 웃으십시다.

 

 

프로이트보다 더 정확하게 정신세계를 분석하고


역학과 성명학을 완벅하게 정립한 역학계의 이단자 


청암 박 재 현



Posted by 뽀르니의 생각 :